쿠사카 겐즈이
(1840년 5월 ~ 1864년 8월 20일)
1. 개요
일본 조슈 번(현 야마구치현) 하기 출신의 무사.
요시다 쇼인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 존황양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2. 생애
1840년 5월 하기에서 의사인 쿠사카 료테키(久坂良迪)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요시마쓰(吉松淳三)의 사숙(글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번교인 메이린칸(明倫館)에 들어갔고, 이후 의학 교육기관인 호생관에서 서양 학술을 연구하는 난학(蘭学)을 배웠다. 1853년 여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이어 1854년에는 형 구사카 겐키와 아버지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가문의 대를 잇게 되었다.
1856년 규슈에서 유학할 당시 요시다 쇼인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이듬해 하기로 돌아와 쇼인의 제자가 되었다. 1857년 그는 쇼인의 여동생 스기 후미(杉文)와 결혼하였으며, 1858년에는 교토와 에도에서 유학하였다.
그러다가 1859년 안세이 대옥이 발생하여 스승인 쇼인이 처형당하자, 그의 뒤를 이어 본격적으로 존황양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막부에 양이를 촉구하기 위해 조정의 칙사 산조 사네토미, 아네가코우지 긴토모와 공동으로 에도에 들어가 타카스기 신사쿠와 함께 '미타테구미(御楯組)'라는 정치결사 조직을 결성했으며, 사카모토 료마와도 교류하였다.
1862년에는 타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시나가와에 있던 영국 공사관에 방화를 저질렀다. 그 후 교토로 가서 덴노의 친정을 돕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으나, 1863년 발생한 '8월 18일의 정변'으로 정세가 일변하였고, 겐즈이는 정무역(政務役)으로 교토에 주재할 것을 명받았다.
1864년 6월 교토의 수비를 담당하던 치안 유지 조직인 신센구미가 잠복해 있던 조슈 번의 존황양이파를 습격하였던 이케다야 사건이 발발하였다. 이에 조슈 번 내에서는 교토로 진군하자는 논의가 들끓었고, 겐즈이는 동료 기지마 마타베, 마키 야스오미와 함께 부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나아가 사카이마치고몬(堺町御門)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부상을 당한 그는 데라지마 추자부로와 함께 다카스카사 저택에서 자결하였는데,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